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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따라 세계여행::229일] 시간 죽이기 그리고 식겁
    세계여행/남미 2009 2011.07.05 09:00


    0 9 . 1 2 . 1 8 . 금 | 칠레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산 뻬드로 데 아따까마) Chile San Pedro de Atacama)


    오늘 라 세레나로 간다.
    저녁에 출발하는 버스를 예매해 시간이 한가득 남았다.
    하지만 마땅히 할 것이 없다.

    어제 달의 계곡 투어를 다녀왔고
    손바닥만한 마을도 거의 다 둘러봤다.
    다른 투어나 레저가 있긴 하지만 그다지 당기지 않았다.

    어제 갔었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어제 갔었던 숙소 근처 피씨방에 들렀다.
    그런데 갑자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이버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와버렸다.

    정전. 이제 겨우 20분 썼을 분인데, 정전이라니...
    초딩표 짜증이 욱 솟아올랐다.



    체크아웃하고 짐을 맡겨 놓은 숙소로 돌아왔다.
    마당의 그늘에 앉아 멍 때리다 다시 노트북을 켰다.
    팔도 별미들로 염장을 지르는, 하지만 보지 않을 수 없는 1박2일을 틀었다.
    하지만 작은 노트북의 작은 배터리는 1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숙소 마당 한켠에서 전원을 발견했다.
    산삼을 발견했을 때에 버금갈 것 같는 희열 속에 플러그를 꽂았지만 그것은 죽은 전원.
    답답하다. 1박2일은 어떻게 끝이 났을까?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더워진다.


    이제 뭘할까?




    무선인터넷이 되는 카페에 가서 주스 마시면서 인터넷이나 쓸까?
    첫번째로 찾은 집은 저녁에만 영업.
    두번째로 찾은 집은 전원이 없어 포기.

    방황하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그저께 저녁을 먹었던 식당에 갔다.
    이 식당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선인터넷이 제공되나 접속이 되지 않았던 곳.
    오늘은 혹 되지 않을까, 기대에 차 노트북을 켰지만 역시나.

    오렌지주스와 출출해 하는 라니를 위해 음식을 주문하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봤다.
    그 테이블로 말할 것 같으면 그저께 왔을 때 알바생이 노트북을 두고 인터넷을 즐기던 자리.
    어라, 접속이 된다. 우리가 앉았던 자리가 문제였구나...

    인터넷에 연결되었다는 표시가 뜸과 동시에 생기가 돈다.
    이런 걸 중독이라고 해야 하나...
    남미에 와서 먹었던 오렌지주스 중에 가장 형편없는 맛임에도 용서가 된다.




    그렇게 인터넷질이나 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라 세레나로 가는 버스는 저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있었는데,
    17시간 정도 걸리므로 오후 3,4시 정도에 타도 다음 날 오전 8,9시에 떨어지니 괜찮은데,
    굳이 저녁 버스를 고집해야할 이유가 없는데,
    왜 7시 버스를 끊었을까?

    제대로 시간을 계산해 보지도 않고 장거리는 밤에 타야 다음 날 밝을 때 도착한다는
    무의식 때문이었는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저녁 버스를 선택해 버렸다.
    바보.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카페에서 인터넷 쓰며 한참동안 쉬다가 이제 슬슬 떠날 채비 해야겠다며 일어났다.
    6시40분. 어제 봐둔 통닭집을 찾아갔다. 닭과 감자튀김만 하는 집.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버스표를 꺼내보던 라니의 눈이 한가위 보름달처럼 커졌다.
    "버스, 7시 반이 아니라 7시 출발이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7시 반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왜 7시야...

    직접 확인해 봤지만 7시임이 분명할 뿐이었다.
    갑자기 맥박이 빨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주방에서는 열심히 닭과 감자를 튀기고 있지만 아직 우리 차례는 멀었다.
    닭과 감자 때문에 버스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닭과 감자를 버리고 가자니 아깝기만 하다.

    그냥 가야되나 말아야 하나 발을 동동 구르는데 닭과 감자가 나왔다.
    소스도 안 뿌리고 봉지를 뺐다시피 하며 가게에서 튀어나왔다.
    칼 루이스처럼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맡겨놓은 배낭을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메고 다시 뛰쳐나왔다.
    전화 통화중이던 주인과는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떠나버렸다.

    무거운 배낭이 몸을 짓누르니 맨몸일 때처럼 달릴 수가 없었다.
    마음은 급하고 라니는 자꾸 뒤쳐지고. 미칠 지경이다.


    2층 버스의 2층.


    다행히 마을이 작은 덕분에 7시 5분전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우리보다 늦게, 7시 넘어서 온 사람도 있었고 버스는 아주 친절하게 그들을 기다려 태우고 출발했다.

    한숨 돌리며 어떻게 된 일인지 되짚어봤다.
    7시 출발표인데 나는 왜 7시 반으로 알고 있었을까?

    예매할 때 7시 출발, 7시 반 출발 버스가 있었다.
    그런데 7시 반 출발 버스가 7시 출발 버스보다 더 일찍 목적지에 도착하는 거였다.
    그래서 7시 반 출발 버스를 예매하려고 했는데 우리 둘이 같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7시 출발 버스를 예매했었다.

    바보 같이 그래서 헛갈렸던 것이다.
    시간이 덜 걸리는 7시 반 출발 버스에 미련이 많았던가 보다.

    아무튼 십년감수했고 어쨌거나 버스를 놓치지 않아 다행이다.

    .....


    칼라마(깔라마 Calama)라는 도시에 들렀다.
    손님을 태우기 위해 터미널에 잠시 정차했다.

    우리 또래 쯤 될 것 같은 건장한 남자가 버스 2층에 올라왔다.
    우리 자리 반대편 창가 자리에 가방을 툭 던져 놓고는 다시 내려갔다.
    나도 바람 쐬러 버스에서 내렸는데 남자는 화장실에 가는 듯 했다.

    터미널을 잠깐 둘러보고 다시 버스에 탔는데 그 남자 자리가 왠지 횡해 보였다.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던 라니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잠깐 못 본 사이에 가방이 없어진 것 같다고 했다.

    잠시 후 남자가 돌아왔고 가방이 사라진 것을 알고는 다시 뛰쳐 내려갔다.
    그리고는 빈 손으로 돌아왔다. 허망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버스는 무심하게 터미널을 떠났다. 남자는 원망스런 눈빛으로 창 밖 터미널을 쳐다봤다.
    한 손으로 빡빡 깎은 머리를 감싸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얼마나 우울할까?
    도둑을 잡기나 할 수 있을까? 잡은들 소중한 물건들을 찾기나 할 수 있을까?
    마음 속으로 그를 위로하며 다시 한 번 경각심을 일깨웠다.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짐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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