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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 농가주택 리모델링 12] 정화조와 함께 시작한 12월
    제주/생활 2011. 12. 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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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 1 2 . 0 1 . 목


    한라산에 한창 단풍 불이 번져가던 10월,
    그 10월의 끄트머리에 시작한 시골집 고치기 공사가 12월을 맞았다.


    12월의 첫 날은 정신없이 시작되었고
    공사 시작 후 가장 시끄럽고도 분주하게 흘러갔다.
    무려 4개팀이 그 작은 공간 곳곳에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다.



    정화조를 묻어야했다.
    오수관이 깔린 동네에는 설치할 필요가 없는 정화조.
    안타깝게도 이 동네에는 오수관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더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2013년 완공 예정의 오수관 설치공사가 진행중이라는 것.

    한 1년 몇개월 더 일찍 오수관이 깔리기만 했어도
    이 난리부르스를 떨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하루 내내 오수관과의 빗나간 운명을 아쉬워했다.



    아침 일찍 굴삭기가 들어왔다.
    정화조를 묻을 자리에 힘차게 첫 삽질을 한 순간, 검은 암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산섬 제주도.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화조를 묻을 바로 거기, 거기에만은 돌덩어리가 없길 바랐다.

    다른 공간이 있긴 했지만 정화조를 묻기에는 적합하지도 않았다.
    거기라고 암반이 없을리도 없고.

    하는 수 없이 정면돌파, 격파 결정.
    그런데 이 굴삭기로는 돌 깨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더 큰 굴삭기가 와서 하루만에 다 깨부수고 정리하고
    정화조 묻는 게 오히려 싸게 먹힐거란다.

    초보 건축주는 건설 건축 토목 까막눈이라
    계산이 잘 서지 않았고 그리 오래 고민할 수도 없었다.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굴삭기 기사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곧 엄청난 위용의 포크레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몸집 만큼이나 큰 소리를 내며 암반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조용한 작은 마을이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큰 굴삭기가 암반을 부수는 사이
    작은 굴삭기는 실외 화장실을 뭉개버렸다.

    오래 전에 만들어 놓은 옥외 재래식 화장실이 많이 남아 있는 시골 농가.
    이 집 마당 한 켠에도 초라한 화장실이 남아 있었다.
    이제 집 안에 수세식 화장실을 마련할 것이므로 역할을 상실했다.
    역할을 상실한다해도 곧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들도 있지만 이 화장실은 제거대상에 올랐다.

    모양새만 갖추고 있는 낡은 화장실은 굴삭기의 가벼운 놀림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곧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화장실과 돌담 사이에는 큰 나무 한 그루가 갑갑하게 자라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그가 자리잡은 그 좁은 공간만큼이나 기구했다.
    이 집에 사셨던 할머니는 화장실과 돌담 사이 그 나무 아래에서 쓰레기를 태우셨다.
    그 담을 함께 쓰는 이웃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바로 그 담 너머를 소각장으로 쓰고 계셨다.

    도시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가내 소각장.
    소각용 드럼통은 생활필수품으로 여겨지는 시골.
    종이류 뿐만 아니라 온갖 불에 타는 것이면 플라스틱이고 비닐이고 가리지 않고 태워진다.
    다이옥신 같은 것은 전문가들이나 쓰는 특수한 용어일 뿐이다.

    아무튼 그 자리에서 나무는 용케 자라났지만 불을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흉한 모습만 남기고 죽어버린 나무.
    사연은 안타깝지만 그도 제거대상에 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큰 굴삭기는 암반 깨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축을 울리는 대형 못이 암반을 파고 들었다 뽑히면 작은 절벽이 만들어졌다.
    현무암 덩어리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땅 표면에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던 것이다.
    정화조를 묻을 수 있을만큼 깊이 파낼 수 있을지 의문이 일 정도였다.






    잠시 건물 안을 들여다봤다.
    실내도 시끄럽고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대의 굴삭기가 점령해버린 마당을 피해 실내로 들어온
    목수님과 조수님은 먼지를 마셔가며 나무와 씨름을 하고 계셨다.
    천장에서는 전기기사님이 배선 작업에 여념이 없으셧다.
    그리고 돌창고에서는 오래된 돌벽을 콘크리트로 보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기계의 힘은 대단했다.
    깨부수고 걷어내기를 여러번.
    마침내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사람이 직접 해야 했다면 아마 정화조 묻을래다 늙어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당의 낮은 돌담, 그리고 옆집과의 경계 돌담을 살려내며
    좁은 공간에서 정말 아슬아슬하게 파낸 그 구덩이에
    드디어 정화조가 자리를 잡았다.

    묻혀가는 정화조를 보고 있는데 뭉클했다.
    정화조를 바라보며 벅찬 마음을 가져 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비싼 일당의 굴삭기를 부른 김에 석분도 오늘 깔아버리기로 했다.

    거대한 굴삭기에 이어 한 쪽에 바퀴가 무려 4개나 달린 거대한 덤프트럭까지 등장했다.
    멀찌감치에서 보면 시골 동네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걸로 오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12월의 첫 날이 또렷한 기억으로 새겨지며 폭풍 같이 흘러갔다.
    정신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 한시름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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