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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난생 처음 마주한 난처하기 이를 때 없는
일이기에 겪고 난 직후에 글로나마 허망한
마음을 달래려고 했었는데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이제 다 지난 일로 담담하게 굳어져버린 일을
뒤늦게 꾸역꾸역 되새김질 하느니 그냥 서서히
잊혀지게 쓰다만 글을 지워버릴까도 했었다.
그러나 사진과 글로 확실하게 끝을 맺는 것이
상처의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마무리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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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사람 일이란 것이.
오랜 시간 준비해온 것들이 실현을 눈 앞에 두고
몇시간만에 사라져버리는 허망한 경험을
하게되리라 누가 알았을까?
며칠간의 속앓이 후에 돌이켜 보니 그만했기
다행이다, 생각한다. 그 방법 밖에 없기도 하고.
비행기를 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최근 몇년간 너무 많지 않았던가.
금전적 정신적 손해는 막급하지만
여행은 또 가면 될 일이니까.
그랬다. 여행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제주도 숙박업의 비수기, 겨울이 왔으니
숙박업주는 이제야 편안하게 휴가를 떠난다.
라오스로 갈 참이었다.
항공권과 숙소 모두 좋은 가격에 잘 구해 두었다.
빠트린 짐을 공항 가는 길에 떠올렸지만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면세점도 있고 현지에서 구입해도 된다.
여행을 가는 중이다.
잔잔한 일들은 들뜬 마음으로 다스리기 충분하다.
공항은 북적거리고 있었다.
복잡하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여행을 떠나고 있으니까.
수하물로 붙일 짐은 없었고
자동탑승권발매기가 있어 가볍게 발권을 했다.
그런데 출발시간이 2시로 찍혀 있었다.
분명 12시50분 비행기로 예약을 했는데.
오는 길에 휘날리던 눈발을 기억했다.
날씨 탓에 지연되나보다 했다.
제2공항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붐비는
제주공항의 주말, 인천공항까지 갈 시간이
촉박해졌지만 지연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대기시간이 늘어나 느긋하게 햄버거를 점심으로 먹었다.
여유롭게 보안검색대를 지났다.
자켓을 다시 입고 캐리어를 챙기는데 아뿔사,
창 밖 활주로에 눈보라가 휘몰아 치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할때보다 상황이 심각해졌다.
조급해진 마음 가다듬고 탑승구로 향했다.
전광판에 출발시간이 나와있지 않았다.
탑승구 앞에 서 있던 직원에게 물었다.
김포에서 아직 비행기가 오지 않았다고 했다.
언제 올지 모르고 그래서 언제 출발할지 알 수 없단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정신을 차리자.
아직 시간이 남았다. 제발 2시에 뜰 수 있게만 와 다오.
초조한 마음으로 계속 시계와 창밖을 번갈아 봤다.
눈보라는 더 강렬해졌고 활주로가
보이지 않을만큼 흐려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2시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전광판에는 여전히 '지연'이라는 글자만
찍힐 뿐 출발시간은 표시되지 않았다.
괜찮아. 2시반에 출발해도 갈 수 있어.
공항철도 시간표를 확인하며
'제발'을 속으로 되뇌었다.
시간은 타들어가는 마음과
상관없이 부지런히 흘러갔다.
마침내 비행기가 왔다. 하지만 3시5분 출발. 늦었다.
김포공항 활주로에서 인천공항까지 수퍼맨이나
아이언맨이 하늘로 날아서 데려다주면 모를까,
라오스행 비행기의 탑승 수속 마감시간은 물론이고
출발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체념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일단 비행기에 올랐다.
출발하기를 기다리며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고민하며 의논했다.
밤에 출발하는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가 있었다.
하지만 요금이 문제였다.
처음 구매했던 표값의 두배에 달했다.
숙소는 또 어떻게 하나?
환불불가를 조건으로 할인을 받은 예약인데...
막막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데
비행기는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출발시간이 지나갔다. 탈 때만 해도 날씨가 호전되어서
눈도 잦아들고 활주로의 눈도 많이 녹았는데
어느새 다시 눈발이 심해져갔다.
하늘에서 받아야할 음료서비스를 지상에서 받았다.
곧 안내방송이 나왔다.
동체에 쌓인 눈을 제거해야
이륙할 수 있어 작업중이라고 했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창 밖을 바라보는데
이건 작업을 한다고 제거될 수준이 아니었다.
어떻게 되든 서울로 갈 생각이었다.
가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정 안되면
서울에서 놀다 오든지.
그러나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항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기내 대기시간이 너무 길어져 일단 비행기에서 내려
다시 대합실에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항공사 직원이 설명했다.
결항이 결정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뜰 수 있을지 결항이 될지 알 수 없다.
결정이 언제될지도 또한 알 수 없다.
기다리실 분은 기다리시고
돌아가실 분은 환불해 드리겠다.
하지만 창 밖을 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미련을 둬봐야 부질없는 일이었다.
환불처리에 대한 안내를 받고 공항 청사 밖으로 나왔다.
다 끝났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날은 스산하기만 하다.
얼른 집에 가서 온수매트 켜고 이불 뒤집어 쓰고 싶다.
그런데 또 다른 난관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청사 밖은 청사 내부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제설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고 체인을 달지 않은
차들은 낮은 경사도 오르지 못해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아가지 못하는 차들 때문에
정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공항 바로 앞 공영주차장이 만차여서
공항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어놓았다.
버스든 택시든 타야하는데 길은 막히지
사람은 많지 어느 것 하나 쉽지가 않았다.
버스가 한대 오면 사람들은 득달같이 몰려들었다.
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더이상 탈 수가 없는
상황인데도 매달리듯 올라타려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전쟁통 같았다.
결국엔 경찰이 나타나 정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눈이 오는 상황을 보니
더 기다리다가는 공항에 갇힐 것 같았다.
힘들겠지만 걸어서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가기로 했다.
잔뜩 흐리니 날은 더 빨리 어두워졌다.
눈보라는 전혀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았다.
눈 밭 위를 지나는 캐리어 아래는
젖어가고 위에는 눈이 쌓여갔다.
얼굴 한 쪽은 눈과 바람을
직격으로 맞아 점점 얼얼해졌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가는 길에 있는 맥도날드에라도
얼른 도착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 길에 우리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
위로라면 위로였다.
비상등 켜고 바퀴를 헛돌리고 있는 차 뒤로 줄줄이
서 있는 차들을 보면서 힘들어도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위로라면 위로였다.
눈보라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경사진 눈길을 걸어
가까스로 맥도날드에 도착했다.
매장에는 이미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여행객들로 가득했다.
젖은 머리와 옷을 닦아야하는데 수건이 없다.
호텔에 갈 것이었으므로 수건은 챙기지 않았다.
반팔 티셔츠를 캐리어에서 꺼내 대충 닦았다.
햄버거와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차를 탈 수 있다.
비록 체인은 없지만 조심해서 가면
오래 걸려도 집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눈이 그친 틈을 타서 다시 길을 나섰다.
눈이 그쳐서 출발을 했는데
금새 다시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주차장에 거의 다 닿을 무렵에는 정면에서
불어오는데 고개를 들기 힘들 지경이었다.
지난 달에 봤던 영화 '히말라야'가 생각날 정도의
눈보라를 뚫고 겨우 주차장에 도착했다.
수북히 눈이 쌓인 차에 탔다는 안도감은 잠시였다.
또다른 난관과 마주했으니,
그것은 타고 있는 이 차가 전기차라는 것.
공항 바로 앞의 공영주차장을 이용할 계획이어서
주차요금을 50% 할인 받을 수 있는 경차인
레이 전기차를 가지고 왔다.
중요한 것은 남아있는 배터리 용량으로는
집까지 갈 수가 없었다.
가까운 충전소에 가서 충전을 해야하는데
길은 빙판이고 체인은 없다.
앞유리에 얼어붙은 눈을 녹이며 고민했다.
괜히 위험하게 차를 움직이지 말고
시내에서 하루 자고 갈까?
하지만 내일은 또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시내에서 고립될 수 없다.
부담이 되어도 오늘 집에 가는 게 낫겠다.
가까운 충전소 가는 길에 이마트가 있으니
가서 체인을 사고 충전을 하러 가자.
조심스럽게 출발했다.
눈이 가득 쌓인 넓은 도로, 계속 내리는 눈.
아이슬란드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신호가 걸릴 때마다 심장이 쫄깃해졌다.
서다가 미끌려 앞차를 받을까봐.
출발하다가 미끌려서 움직이지 못할까봐.
그렇게 긴장 가득 담긴 발놀림으로
겨우 이마트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차장 입구가 평소와 다르게 어두웠다.
설마. 그럴리가 없어.
주차장 입구에는 큰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오늘은 재래시장 어쩌구 저쩌구.
그랬다. 하필 그 날이었다. 대형마트 정기휴무일.
바로 옆 롯데마트도 같은 날 쉬니
체인은 물건너 간 것이었다.
절망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일단 충전부터 하자.
노형동 주민센터로 향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힘들게 거쳐 갔는데
업무시간이 지난 이후부터는 발길이 뚝 끊겨
입구부터는 지금까지 온 눈이
그대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눈을 헤치며 차가 나아갔다.
충전기 앞에 주차를 간신히 했다.
또 '그런데'...
계기판 모서리에 누군가가
'고장'이라고 작게 적어놓았다.
하지만 충전기 계기판은 정상적으로 켜져 있었고
사용자 인증도 성공적으로 거쳤다.
아마도 수리가 된 모양이었다.
아 '그런데'...
충전장치를 차에 꽂고 충전이 시작되길
기다리는데 에러 발생.
눈을 맞으며 계기판을 바라보는
모양새가 더 처량해졌다.
그럴리가 없어. 그러면 안돼.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똑같았다.
정말 주저앉고 싶었다.
어떻게 하루종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오늘은 도대체 무슨 날이란 말인가?
이제 남은 주행거리는 20여 킬로미터.
하지만 추운 날씨에 유리에 김이 계속 서려
공조기를 돌려야 해 실제로 갈 수 있는 거리는
20킬로미터가 되지를 않았다.
다른 가까운 충전소까지 몇 킬로미터 안에 있지만
이 살얼음판 같은 길을 또 타고 가야하니 문제다.
거기다 다시 찾아간 충전소의 충전기까지
문제라면 그 땐 정말 상황 종료다.
어짜피 모 아니면 도인 판이니 가보기로 했다.
모든 차들이 벌벌 기어다니는 도로를
따라 도착한 충전소는 다행히 정상이었다.
충전은 어느 때보다 더딘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고 느낌상으로는 더더욱 그랬다.
가로등 불빛에 빛나며 흩날리는 눈의 양은 참 대단했다.
바람에 키 큰 레이가 가끔 흔들거렸다.
충전 중에 히터가 가동되는지도 모르겠고
설사 가동된다고 해도 얼른 집에 가고 싶고
조금이라도 빨리 충전됐음 해서
시트 열선만 켠 채 기다렸다.
라오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음악을 듣다 단잠을 청했을지도 모를 시간에
우리는 차가운 차에서 입김을 불며
차디찬 손을 녹였다.
집까지 충분히 갈 수 있을 정도로만 충전하고 중단했다.
이제 집에 가는 일만 남았다.
집까지는 40여 킬로미터.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무사히 도착했으면
좋게다는 바람과 함께 천천히 출발했다.
시속 30~40km로 기어가다시피 달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런대로 갈만했다가
보통 때의 기준으로 집까지 10여분 남은 곳에서부터
다시 눈보라를 만났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내렸다.
차 바로 앞에서 눈을 뿌리는 느낌이었다.
전조등의 불빛은 무기력했다.
그 눈보라를 헤치고 겨우 정말 가까스로 집에 도착했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밤11시는 라오스 비엔티안 공항에 도착할 시각이었다.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라오스에 발을 내딛어야 할
시각에 가득 쌓인 눈을 뽀드득 밟으며
현관문을 여는 마음, 참담했다.
이기고 있는 9회말 투아웃.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대망의 우승.
우승을 눈 앞에 두고 마운드에 오른 마무리 투수.
허나 수비진의 연이은 실책으로 끝내기 점수 헌납.
한동안 마운드를 떠나지 못하는 투수.
동료들의 다독임에 겨우 경기장을 떠나는
투수의 마음과 같다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일까?
3박5일의 여정은 12시간의 방황으로 쪼그라들었고
1년에 한 번 해외로 떠나는 휴가는
그렇게 눈보라와 함께 하얗게 날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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