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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따라 세계여행::196일] 불심검문
    세계여행/남미 2009 2011. 4. 19.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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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9 . 1 1 . 1 5 . 일 | 콜롬비아 칼리(깔리) Colombia Cali


    직장에 다니면 요일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다.
    왠지 모를 짜증이 밀려오면 일요일, 몸이 무거우면 월요일, 지루하면 수요일, 흥분되면 금요일.
    직장에 다니지 않더라도 텔레비전 드라마를 즐겨본다면 요일 잊어버릴 일은 없다.
    월화 기획드라마, 수목 미니시리즈, 주말연속극.

    여행을 하는 동안 요일을 잊고 지내는 날이 많았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휴관일을 챙겨야 할 때나 교통편 확인할 때 등
    몇 가지 일을 제외하면 굳이 요일을 챙겨야 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일요일임에도 하선생님은 가게에 나가셔야 한다고..
    새로운 옷들이 들어온단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앉아 있을 순 없어 하선생님과 함께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일요일을 맞은 이른 아침의 칼리 시내는 고적했다.







    가이드북도 있고 하선생님께서 가 볼만한 곳들을 알려주시긴 했지만
    잠이 덜 깬 우리는 의욕을 많이 상실했다.
    칼리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오르기는 귀찮았다.
    동물들을 가둬 놓은 동물원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텅 빈, 격자무늬 길에서 방황했다.
    오락실 규모의 작은 카지노들에만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시간은 더디게 갔다.
    점심시간에 하선생님과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았다.
    공원 한 켠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교대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노점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파라솔을 폈지만 아직은 파리만 날릴 뿐이었다.








    시식용으로 잘라놓은 게 아니라 판매용.


    .하선생님 마치는 시간에 맞춰 가게 들러 접선, 슈퍼에 들러 쇠고기, 채소 사서 선생님 댁에서 점심 식사.
    .좀 이르긴 했지만 저녁까지 얻어먹고 버스터미널.
    .하선생님이 알려주신 버스회사에서 8시 출발 버스표 구입.







    열흘만에 다시 야간버스다. 이번에는 12시간 예정이다.
    가이드북에는 그렇게 나와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정.

    출발시각이 다가오자 버스 승강장 앞으로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저마다 큰 가방, 큰 보따리를 가지고서.

    버스 좌석이 9번과 10번으로 이미 정해져 있으니 서두를 것은 없다. 
    의자에 앉아 배낭에 다리를 올리고 떠나려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사람들은 무슨 사연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떠나는 것일까?




    출발시각에서 25분이나 더 지난 후에야 버스는
    국경도시 이피알레스(이삐알레스 Ipiales)를 향해 터미널을 빠져 나갔다.
    살사로 유명한 이 곳 칼리에서 공연 하나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다.

    한참을 신나게 달리다 갑자기 버스가 멈추었다.
    그리고 형광등이 환하게 켜졌다. 창밖을 내다봤지만 휴게소는 아니었다. 

    경찰이 버스에 올라왔다.
    매서운 눈초리로 버스 안을 둘러보더니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내 앞에서 멈춰서서는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ㄷ'자를 만들며 스페인어로 말을 쏟아냈다.
    당연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그리는 것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갑자기 맥박수가 빨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난, 우린 잘못한 것도 없는데...
    버스에서 내려서도 계속 똑같은 손가락질을 했다.
    저게 무슨 표시일까? 돈을 달라는걸까?
    버스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쳐다 보는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을리는 없을텐데...
    답답한 시간이 아주 잠깐 흐르고 난 뒤 그가 오른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남미의 많은 장거리 버스에는 저런 발받침대가 있었다.
    라니와 달리 나는 처음 한동안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오히려 불편했다.



    그의 손에 쥐어져 나온 건 다행히 지갑이었다.
    지갑에서 신분증 같은 것을 꺼내 보였다. 그제서야 알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만든 'ㄷ'자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나도 손을 등뒤로 가져가 바지 안 허리에 차고 있던 복대에서 여권을 꺼냈다.
    그가 패스포트란 영어 단어만 알았어도 필요 이상의 식은땀은 흘리지 않았어도 됐을텐데 하면서...

    비자와 입출국도장이 몇 페이지에 걸쳐서 찍혀 있는 여권을 그는 어둠속에서 성의없이 넘겨보았다.
    이제 상황정리가 되려나... 그런데 팔을 붙잡더니 버스 옆에 모여 있던 한 무리의 경찰들쪽으로 이끌었다.
    다른 경찰에게 내 여권을 넘겼다. 이건 또 뭐람. 이제 그만하자, 제발. 여권엔 아무 하자도 없다구.

    버스 안에서 내 걱정을 하고 있을 라니가 걱정되었다.
    버스 안에서 영어가 되는 사람을 섭외해와야 하나.
    그건 또 이 사람들한테 어떻게 얘기하나. 

    여권을 넘겨준 경찰과 넘겨받은 경찰이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여권을 쥐고 있던 경찰이 나를 보며 말을 시작했다.
    "&#$*#@&$#% 재키 찬 &%#@$%&$@"
    다른 말은 못 알아듣고 재키 찬만 건졌다.
    "재키 찬 치노(Chino, 중국사람), 나 꼬레아노(Coreano, 한국사람)."
    내 말을 듣고 그가 웃었다. 하지만 긴장을 풀 순 없다.
    도대체 그들이 원하는 건 뭘까?
    영문도 모른 채 여권을 빼앗긴 채 어두운 도로변에 혼자 서 있자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초조한 눈빛으로 사냥꾼을 앞에 둔 노루의 눈망울로
    그들을 멀뚱히 바라보다 잠시 후 여권을 돌려받았다.
    땡큐 베리 머치 라는 말과 함께.

    내가 더 고마웠다.
    잘못한 것도 없이 마음 고생을 한 내가 고마워하는 것이 모순이긴 했지만 어쨌든 고마웠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버스는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실내등을 꺼 버스 안은 어두워졌고 밤은 더욱 깊어가지만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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